히말라야 8000m급 9개봉 등정한 오은선
김삿갓
2009.03.16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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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8000m급 9개봉 등정한 오은선
기사입력 2009-03-16
동료 시신보며 정상공격 8천m에서 벌어진 일을…지상의비난에 상처받아 산이란 내게 여전히 새길 여자는 못해낸14좌완등 내년까지 다오르고싶어 정상에 서면 힘들 뿐이죠 산이 남자보다 좋지만 산에서 죽고 싶진 않아요 "강풍이 불고 한치 앞을 못 볼 정도로 가스(산안개)가 심했어요. K2 봉(峰) '캠프3' 텐트에 먼저 내려와 있었지요. 그런데 바로 뒤따라오던 대원이 서너 시간이 지나도 오질 않아요. 그 시간은 지옥이었습니다. 그 부모님과 산악계 선배들을 어떻게 볼지…, 실종 대원을 걱정하며 눈물 콧물 찔찔 짜면서도 나는 내 허기진 배를 위해 음식을 달게 먹고 있는 겁니다. 인간이라는 게, 도대체 삶과 죽음이 뭔지…." 오은선(43)씨는 내 앞에서 또 눈물을 줄줄 흘렸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인터뷰하는 동안 벌써 세번째다. "창피해요" 하고 훌쩍거리며 변명했다. 이런 그녀가 어떻게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14좌 중 9개를 올랐고, 그중 4개봉을 작년 한 해 연속 등정했던 '철(鐵)의 여인'일 수 있을까. 키 155㎝, 체중 48㎏의 모습 어디에도 그런 증거가 없다. ―이런 당신을 왜 산악계에서는 "독한 오은선"이라고 부릅니까? "독하다는 말을 많이 들어 이제는 새삼스럽지 않아요. 2004년 에베레스트봉(8848m)을 단독 등정하고 들어오니, 술자리에서 한 선배가 처음 '독한 년'이라고 불렀죠. 독하지 않고 등반을 어떻게 하나, 독하다는 것이 나쁘다는 의미만 아닐 거예요." ―정말 본인 스스로 생각해봐도 독한가요? "어떨 때는 '내가 바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요. 저는 오로지 산에만 매달려왔어요. 처음 '에베레스트봉 여성원정대'에 선발됐을 때 3년간 다니던 서울시 공무원직을 사표 냈어요. 직장을 다니는 동안에는 하루도 결근이 없었어요. 그 뒤 학습지 교사를 할 때도 그렇게 털고 떠났어요. 한번도 8000m 원정 앞에서 망설여본 적이 없습니다. 2000년 말 박영석(朴英碩) 대장이 K2봉에 가자고 했을 때는 스파게티 가게를 하고 있었지요. '이 나이에 시집도 안 가고…' 하는 상념이 잠깐 있었지만, 곧 가게를 정리했어요. 여태껏 사귀던 남자가 없었다면 거짓이고, 이들도 아직 산만큼은 저를 매료시키진 못했어요. 살면서 정말 유일하게 매달렸던 것은 산뿐입니다. 전 마음을 정하면 주변 상황의 어려움이나 시련이 있어도 그냥 쭉 밀고 나갔어요." 인터뷰가 있던 날 그녀는 원정 장비를 꾸렸다. 오는 19일 또 혼자서 히말라야의 캉첸중가봉(8586m)으로 떠난다. 그녀의 목표는 여성 산악인 최초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완등하는 것이다. ―14좌를 완등한 산악인들은 이미 14명이나 있는데 이제 그 달성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14좌 등반은 남성 중심의 세계였지요. 아직 여성이 이룩한 적이 없어요. 남성은 했지만 여성은 못한 영역이니까 도전하는 것이죠. 물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남들이 갔던 길이라도 제게는 여전히 새로운 길이죠." ―등반에서 추구하는 멋과 의미, 삶의 성찰은 사라지고 당신에게는 어쩐지 서두른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등반이 '레이스(race)'는 아니지 않나요? "여성 산악인 중에는 최초 기록이 없고 현재 서로 경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 나이도 적지 않아요. 이 나이쯤 대부분 고산 등반을 끝내죠. 저는 진행 중이니까, 빨리 끝내고 싶은 거죠. 여유롭지 못한 점은 있지만. 이런 기록을 예견하고 등반을 한 것은 아닙니다. 제게 평범한 삶이 주어졌더라도 열심히 살았을 거예요. 다만 이왕 뛰어든 거니까 내년까지 독하게 다 올라갈 겁니다." ―산악인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저는 좋아서 간다는 것뿐이에요. 고산에 오르는 것은 고독하고 눈물겹지만, 그 속에서 전 평화를 얻어요. 물론 등반 기록은 제게 명예를 주겠지요. 하지만 왜 산에 가는지, 한 발짝 물러나 객관적으로 나를 볼 때가 많아요. 명예심에 편승해 나 자신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어요."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인데, 당신은 2004년 에베레스트 원정에서 숨져 있는 동료 산악인 박무택씨(대구 계명대 원정대 소속)를 보고서도 정상을 향했지요. 그 상황에서도 올라가야겠다는 마음이 들던가요? "제가 도착했을 때 종료가 된 상황이었어요. 자일에 매달린 채 숨져 있는 그를 보고 펑펑 울었을 뿐입니다. 그 상황에서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었나요? 그때 제가 멈추고 그냥 내려오는 게 옳았을까요? (이듬 해 산악인 엄홍길씨가 시신수습을 위해 '휴먼원정대'를 꾸려 갔으나 시신을 운구하는 데는 실패함.) 당시 전 혼자 내려오는 게 더 무서웠습니다. 외국 산악인들은 올라가고 있었고, '저렇게 죽고 싶지 않다'는 본능으로 그 뒤를 따라갔어요. 제 체력 한계에 직면해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고 싶었지요. 그 상황에서는 이성적인 판단에 좌지우지되는 게 아니라, 몸이 움직이는 본능대로 갔던 거죠." ―내려오니까 말들이 많았지요. "8000m에서 벌어진 것을 지상에서 말하니까요. '정상에 올라가는 것이 전부냐' '휴머니즘 없는 등반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하는 비판에 반론하기 힘들었어요. 이후로 '독한 년'이 됐어요. 생사의 경계에 놓였던 8000m 상황을 알지 못하면서 일방적으로 말들을 했어요. 저를 변호하는 이는 없었어요. 그때 상처를 많이 받은 게 사실입니다(그녀는 그 상황을 떠올리며 울었다)." 이 등반에서 그녀는 가장 죽음에 가까이 갔다고 한다. 정상에서 내려오면서 마지막 캠프(8300m)를 앞두고 그녀는 쓰러졌다. 한 발짝도 더 움직일 수가 없었다. 탈진해 죽어가는 것은 편안했다고 말한다. "왜 숨진 박무택의 표정이 아기가 잠들었듯이 평온해 보였는지를 깨달았어요. 이런 기분으로 가는 거구나…. 그렇게 의식을 잃었는데 머리 위로 환한 빛이 번쩍거렸어요. 다른 원정대의 셰르파가 쓰러진 저를 발견했던 겁니다. 텐트 안으로 부축해 집어넣은 뒤 아이젠과 신발을 벗기고, 산소마스크를 씌워주었어요. 다음 날 의식을 차려보니 한편의 영화를 찍은 것 같았습니다." ―죽음에 대해 생각을 종종 하는가요? "저는 산에서 죽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죽더라도 따뜻한 데서 편하게 죽고 싶어요." ―2007년 같은 소속사였던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의 오희준, 이현조 대원이 추락해 산악계가 초상집이 됐을 때 당신은 K2봉 원정을 떠났지요. 당시 소속사에서는 "이런 분위기에서 가서는 안 된다. 만약에 너마저 사고 나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만류했지만, 당신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건 오래전에 준비된 원정이었어요. 그걸 막는 것은 내게 꼬꾸라져 죽으라는 것이지요. 저는 멈출 수 없었어요. 인간적으로 많은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원정을 갈 경우 자르겠다'고 통첩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굽히지 않았어요. '그까짓 것 자르면 잘라'고. 그렇게 K2봉 등정에 성공했고 돌아와서는 해고됐습니다." 그녀의 첫 고산 등반은 1993년 '에베레스트봉 여성 원정대'로 시작됐다. 그때 캠프3(7300m)까지 올라갔다. 1997년 대학산악연맹 원정대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갸셔브롬 2봉(8035m)에 올라 8000m의 경험을 쌓았다. 하지만 그 뒤로 세번의 원정에서는 모두 정상을 밟는 데 실패했다. ―남성 위주의 원정대여서 당신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인가요. 당시 등반 역량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인가요? "기회란 자의든 타의든 연(緣)이 닿아야 하는 것이죠. 원정대에서는 성별이 아니라 선·후배의 위계질서만 있어요. 세번의 원정에서는 유일하게 나 혼자 여자였으니 생리문제 해결 등 어쩔 수 없는 불편함은 물론 있었지요. 그러나 상대들도 저로 인해 약간 불편했을 거예요. 캠프 구축을 하고 난 뒤 짐을 위로 올릴 때 남자들이 20㎏씩 지면 난 15㎏만 지겠다고 양해를 구해요. 등반 과정에서 남자들이 힘을 많이 쓰니까 나로서는 고마울 뿐이죠." ―초반에 두각을 못 나타냈다가 당신의 등반기록은 불과 4년 만에 이뤄졌습니다. 갑자기 기량이 좋아진 것인가요? "2001년 K2봉 등반에서 7000m쯤 올라가니까 머리가 깨질 것처럼 힘들었어요. 누가 강요한 적도 없는데 이 힘든 짓을 왜 하지, 이것이 내 한계다, 난 8000m를 올라갈 능력이 못 된다고 좌절한 적 있었습니다. 하지만 산에서 내려오면 금방 잊어버리고 다시 빠져들게 돼요. 내게 돌파구가 된 것은 말 많았던 에베레스트봉 등반이었지요. 그걸 계기로 많은 경험을 하고 고소적응력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어요." ―무명의 시절에 당신은 선배인 스타산악인 박영석씨와 엄홍길씨가 얼마나 부러웠나요? "제 눈에는 이 선배들이 불쌍해 보였어요.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고, 자신은 없고 주변에서 만들어놓은 사람만 있는 것 같았어요. 허구한 날 여러 자리에 불려나가는데, 그렇게 해야만 자신에 대한 존재감을 느끼는 것인가. 때로는 침묵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이 선배들과 아주 다르지는 않겠지만 저는 주위에 사람들이 없어도 잘 지내요." ―8000m 봉우리의 정상에 서면 기분이 어떤가요? "어떤 산악인들은 정상에 서면 어떻다고들 말하는 데, 저는 그게 이해가 안 돼요. 제게는 '이제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다. 빨리 내려가 쉬자'하는 힘겨움뿐입니다. 같은 길인데도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가 훨씬 더 길게 느껴져요. 남들이 '그렇게 내려올 걸 왜 올라가느냐'고 물으면, '하루도 안 가 배설할 것을 왜 먹느냐'고 답합니다. 사는 게 그런 것 아닐까요?" 그래도 나는 마음속으로 또 물었다. '내려오기 위해 올라가느냐'고. ‘산소와의 전쟁’ 8000m급 등반 스페인·오스트리아 여성이 11개 봉으로 선두 인류 사상 8000m 높이에 처음 섰던 이는 프랑스 산악인 모리스 에르족이다. 1950년 안나푸르나봉(8091m) 등정에 성공한 그는 동상으로 손·발가락을 거의 잘랐다. 14좌를 처음 완등한 이는 1986년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산악인 라이홀트 메스너. 국내에서는 박영석·엄홍길·한왕용씨가 차례로 완등했다. 여성 산악인은 아직 완등자가 없다. 스페인의 에두르네 파사반, 오스트리아의 겔렌데 칼텐부르너가 11개 봉으로 선두에 있다. 오은선씨(블랙야크 소속)와 이탈리아의 리베스 메로이가 9개, 고미영씨(코오롱 소속)가 7개 봉을 등정했다. 8000m급 고산 등반의 어려움은 무엇보다 그 높이에서는 사람이 정상적으로 숨을 쉬지 못하는 데 있다. 고도가 높으면 공기의 밀도가 감소한다. 그만큼 '숨 쉴' 산소의 절대량이 낮아진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 적은 양의 산소조차 대기압이 낮아 제대로 흡입할 수 없다. 그래서 뇌(腦)나 폐에 산소가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아 이른바 뇌수종·폐수종 등 '고소증세'로 즉각적인 죽음에 이를 수 있다. 일반인들은 통상 3000m 높이부터 고소증을 느낀다. 고소증에 걸린 경우 유일한 처방은 산소마스크를 쓰거나 즉시 고도가 낮은 쪽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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