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산꾼들의 죽음
이만호
2008.06.11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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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973년에 토왕성빙폭 등반중 추락사한 故 송준호산악인의 이야기를
같은 요델산악회 멤버였고 서로 친한 사이였던 최영준회원님과 나누다가 고인의 애인이었던 김백이씨와 그녀의 남편 이야기를 했더니 반신반의 하였지요?
최형이 미국 온 이후 일이고 나도 잘 기억나지 않았던 해묵은 사건이었는데 우연히 인터넷써치를 하다가 2003년 ‘山’지의 기사가 있어 옮깁니다.
쇠고기협상으로 아직도 시끄러운 이때
故이경해씨의 자결이 어떤의미와 역할이 있었는지
되 새겨 볼만도 합니다. (이만호)
칸쿤[추모] WTO 회의에서 자결한 이경해씨는 한때 열정적 산악인이었다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열린 멕시코 칸쿤에서 자결한 이경해씨(李京海·56)-. 13년 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현장에서도 할복, 격렬히 반대의사를 나타냈던 그는 결국 그렇게 격정적인 몸짓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을 준비했던 장수군의 한 공무원은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이경해 전 한농련(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회장을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한국의 농촌이 죽어가고 농민들은 쓸쓸하고도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는 현실을 전세계에 알리고자 했다. 바로 이를 위해 그는 스스로를 희생했고, 때문에 우리는 그를 영웅이라 부른다.”
그 ‘농민의 영웅’ 이경해씨는 한때 열정적 산악인이었다. 인수봉 동양길을 낸 동양산악회에 가입, 암벽에 열중한 한편 77에베레스트 원정 최종 훈련대까지 참가하며 고산의 꿈도 함께 키웠던 산사람이었다.
세계무역기구 5차 각료회의 개막식이 열리던 9월10일 낮 12시50분, 세계적 휴양지인 멕시코 칸쿤-. 이경해씨는 한국 농민단체 회원 150명과 더불어 상여를 앞세우고 1만여 명의 세계 각국 반(反) WTO 시위대와 함께 칸쿤광장에서 각료회의장쪽으로 행진하다가 멕시코 경찰 바리케이드와 맞닥뜨렸다. 그는 바리케이드 위로 올라가 반대 구호를 반복해 외치다가 갑자기 떨어져내렸다. 스스로 자신의 가슴을 칼로 찌른 것이다.
그의 왼쪽 가슴에 꽂혀 있던 것은 13년 전에 썼던 것과 똑같은 그 등산용 아미나이프였다. 젊은 시절 인수봉을 오르던 정열로 그는 세계무역기구의 높은 벽을 뚫어보려 한 것일까.
고향 장수에서 낙농장 크게 일궈
기자는 20여 년 전, 그의 농장을 한 번 방문한 적이 있다. 자기 농장 젖소의 젖을 몇 번 쥐어짜 우유를 한 잔 가득 내서는 거기 빠진 파리 한 마리를 손가락으로 얼른 건져낸 뒤, “자, 원액이라 더 고소해. 마셔 봐” 하고 내밀던 그 때 그의 얼굴은 확신으로 가득차 있었다.
전북 장수에서 그는 야산을 개간, 6만 평 규모에 젖소 100마리의 큰 농장을 일구어내 현대판 상록수로 불렸다. 탄탄하게 기반을 다진 그를 보고 주위 50여 농가도 당시 높은 수익을 올리던 그를 따라 모두 낙농에 나서서 장수군 일대에 목축 붐이 일기까지 했다.
자신감을 가진 그는 고향 후배들을 설득, 자신처럼 낙농의 길로 들어서게도 했다. 그는 “여기는 젖소 키우는 법을 배우려는 후배들이 자는 곳”이라며 방을 소개할 때 가슴 뿌듯이 차오르는 보람을 숨기지 않았다. 그 확신이 종내는 좌절로 몽땅 치환되었을 때, 그리고 후배들의 좌절을 목도했을 때 그가 느꼈을 분노가 어떠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경해씨는 47년 전북 장수에서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진작부터 전원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사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서울시립농대(현 서울시립대)로 진학했고, 혼자 산을 오르내리다가 우연히 당시 동양산악회 회장이던 송영태씨를 만나 본격적으로 암벽에 입문했다. 그는 “등산에 전념하면서 다시 태어난 기분”이라고 말하고는 했다.
이미 중학 시절 태권도 4단을 딴 그는 우연찮은 싸움에 끼어들었다가 무서운 주먹 실력을 보였다. 그 후 그는 전라도 출신 주먹들로부터 끊임없는 유혹을 받았지만, 틈만 나면 산을 오르며 자연스레 그들과 결별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암벽등반보다는 많은 힘을 써야 하는 겨울 종주등반, 혹은 빙벽등반에 강했다고 현 동양산악회 회장 이용대씨(66·코오롱등산학교 교장)는 돌이킨다. 한겨울 종주할 때도 러닝셔츠 바람으로 앞서 러셀하던 그의 모습이 선하다. 그는 그런 힘을 인정받아 77에베레스트 훈련대원으로 선발돼 최종 훈련까지 받았다. 대원 선발부터 훈련까지 총책임을 맡았던 김영도씨(79·한국등산연구소장)는 “말 없이 끝까지 따라온, 기대해볼 만했던 친구”로 그를 어렴풋이 기억한다.
그는 느닷없이 낙향했다. 이용대씨는 “아마도 백이가 졸랐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백이’란 동양산악회 회원들과 종종 함께 암벽등반도 했던 그의 부인 김백이(金白二)씨를 말한다. 그는 김백이씨를 꽃인 듯 귀한 도자기인 듯 애지중지했다. 암벽을 오를 때도 그는 항상 김백이씨 옆을 떠나지 않아 선배들의 놀림감이 됐다.
아내가 옛 애인 앨범과 유품 간직케 한 대범한 마음
김백이씨는 설악산 석주길과 선인봉 요델버트레스 루트를 냈으며 토왕빙폭 등반 도중 추락사한 영웅신화의 주인공 고 송준호씨의 애인이었다. 김백이씨를 ‘까만 돌’이란 애칭으로 부르며 사랑하던 송준호씨가 죽고난 뒤 이경해씨는 동양산악회에서 김백이씨를 알게 되어 결혼까지 했다.
이경해씨는 김백이씨의 과거까지도 몽땅 사랑했다. 김백이씨가 옛 애인 송준호씨의 앨범이며 일기장, 작은 유품들, 이를테면 송준호씨가 까만 돌이라 부르던 그녀 대신 등반 중 품고 다니던 작고 까만 조약돌까지도 버리지 말고 고스란히 간직하게 했다. 목장 초원을 까불까불 손그네를 타는 아이와 더불어 산책하던 두 부부의 모습은 얼마나 다정했는지 모른다. 카메라 앞에서도 그는 아내를 바라보는 시선에 애정을 듬뿍 담곤 했다.
그렇도록 사랑했던 애인이자 아내인 김백이씨는 그러나 10년 전 덤프트럭과 충돌하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녀가 운전중이었고, 그는 옆에 타고 있었다. 만년설의 꿈 대신 아름답고 풍요로운 전원생활의 꿈을 품었다가 결국 아내마저 잃고 만 그는 전원을 떠나 정치 일선으로 나섰다.
결국 직접 정치가가 되는 것이 농촌 현실의 개선에 최선이란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장수지역에서 1,2,3대 도의원에 연달아 당선됐다. 그러나 작년 4·13 지방선거에서는 장수군수에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정부나 여론은 WTO를 앞두고 결국 농산물 시장은 대폭 양보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로선 막다른 골목이었고, 결국 온몸을 던진 마지막 저항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각료회의 개막식이라는,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시점과 장소를 용의주도하게 선택했다. 그의 세 딸은 이미 아버지의 죽음을 예견한 듯 소식을 듣고도 비교적 차분했다. 장녀 지혜씨는 아버지의 시신을 대하고 오래도록 눈물을 흘리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기려 WTO 협상 반대 시위가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시신을 인도하지 않겠다”고도 했다.
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 그는 혼자서 세 딸을 길러왔다. 그중 둘째인 고운씨의 결혼식이 9월28일로 보름여 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심장을 미리 예정한 장소에서 한 치 어긋남 없이 찔러야 했던 선배의 절박감이 그대로 가슴에 전해왔는지, 그의 동양산악회 후배 윤철상씨(45)는 전화기 저편에서 대성통곡하며 울었다.
같은 요델산악회 멤버였고 서로 친한 사이였던 최영준회원님과 나누다가 고인의 애인이었던 김백이씨와 그녀의 남편 이야기를 했더니 반신반의 하였지요?
최형이 미국 온 이후 일이고 나도 잘 기억나지 않았던 해묵은 사건이었는데 우연히 인터넷써치를 하다가 2003년 ‘山’지의 기사가 있어 옮깁니다.
쇠고기협상으로 아직도 시끄러운 이때
故이경해씨의 자결이 어떤의미와 역할이 있었는지
되 새겨 볼만도 합니다. (이만호)
칸쿤[추모] WTO 회의에서 자결한 이경해씨는 한때 열정적 산악인이었다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열린 멕시코 칸쿤에서 자결한 이경해씨(李京海·56)-. 13년 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현장에서도 할복, 격렬히 반대의사를 나타냈던 그는 결국 그렇게 격정적인 몸짓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을 준비했던 장수군의 한 공무원은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이경해 전 한농련(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회장을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한국의 농촌이 죽어가고 농민들은 쓸쓸하고도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는 현실을 전세계에 알리고자 했다. 바로 이를 위해 그는 스스로를 희생했고, 때문에 우리는 그를 영웅이라 부른다.”
그 ‘농민의 영웅’ 이경해씨는 한때 열정적 산악인이었다. 인수봉 동양길을 낸 동양산악회에 가입, 암벽에 열중한 한편 77에베레스트 원정 최종 훈련대까지 참가하며 고산의 꿈도 함께 키웠던 산사람이었다.
세계무역기구 5차 각료회의 개막식이 열리던 9월10일 낮 12시50분, 세계적 휴양지인 멕시코 칸쿤-. 이경해씨는 한국 농민단체 회원 150명과 더불어 상여를 앞세우고 1만여 명의 세계 각국 반(反) WTO 시위대와 함께 칸쿤광장에서 각료회의장쪽으로 행진하다가 멕시코 경찰 바리케이드와 맞닥뜨렸다. 그는 바리케이드 위로 올라가 반대 구호를 반복해 외치다가 갑자기 떨어져내렸다. 스스로 자신의 가슴을 칼로 찌른 것이다.
그의 왼쪽 가슴에 꽂혀 있던 것은 13년 전에 썼던 것과 똑같은 그 등산용 아미나이프였다. 젊은 시절 인수봉을 오르던 정열로 그는 세계무역기구의 높은 벽을 뚫어보려 한 것일까.
고향 장수에서 낙농장 크게 일궈
기자는 20여 년 전, 그의 농장을 한 번 방문한 적이 있다. 자기 농장 젖소의 젖을 몇 번 쥐어짜 우유를 한 잔 가득 내서는 거기 빠진 파리 한 마리를 손가락으로 얼른 건져낸 뒤, “자, 원액이라 더 고소해. 마셔 봐” 하고 내밀던 그 때 그의 얼굴은 확신으로 가득차 있었다.
전북 장수에서 그는 야산을 개간, 6만 평 규모에 젖소 100마리의 큰 농장을 일구어내 현대판 상록수로 불렸다. 탄탄하게 기반을 다진 그를 보고 주위 50여 농가도 당시 높은 수익을 올리던 그를 따라 모두 낙농에 나서서 장수군 일대에 목축 붐이 일기까지 했다.
자신감을 가진 그는 고향 후배들을 설득, 자신처럼 낙농의 길로 들어서게도 했다. 그는 “여기는 젖소 키우는 법을 배우려는 후배들이 자는 곳”이라며 방을 소개할 때 가슴 뿌듯이 차오르는 보람을 숨기지 않았다. 그 확신이 종내는 좌절로 몽땅 치환되었을 때, 그리고 후배들의 좌절을 목도했을 때 그가 느꼈을 분노가 어떠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경해씨는 47년 전북 장수에서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진작부터 전원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사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서울시립농대(현 서울시립대)로 진학했고, 혼자 산을 오르내리다가 우연히 당시 동양산악회 회장이던 송영태씨를 만나 본격적으로 암벽에 입문했다. 그는 “등산에 전념하면서 다시 태어난 기분”이라고 말하고는 했다.
이미 중학 시절 태권도 4단을 딴 그는 우연찮은 싸움에 끼어들었다가 무서운 주먹 실력을 보였다. 그 후 그는 전라도 출신 주먹들로부터 끊임없는 유혹을 받았지만, 틈만 나면 산을 오르며 자연스레 그들과 결별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암벽등반보다는 많은 힘을 써야 하는 겨울 종주등반, 혹은 빙벽등반에 강했다고 현 동양산악회 회장 이용대씨(66·코오롱등산학교 교장)는 돌이킨다. 한겨울 종주할 때도 러닝셔츠 바람으로 앞서 러셀하던 그의 모습이 선하다. 그는 그런 힘을 인정받아 77에베레스트 훈련대원으로 선발돼 최종 훈련까지 받았다. 대원 선발부터 훈련까지 총책임을 맡았던 김영도씨(79·한국등산연구소장)는 “말 없이 끝까지 따라온, 기대해볼 만했던 친구”로 그를 어렴풋이 기억한다.
그는 느닷없이 낙향했다. 이용대씨는 “아마도 백이가 졸랐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백이’란 동양산악회 회원들과 종종 함께 암벽등반도 했던 그의 부인 김백이(金白二)씨를 말한다. 그는 김백이씨를 꽃인 듯 귀한 도자기인 듯 애지중지했다. 암벽을 오를 때도 그는 항상 김백이씨 옆을 떠나지 않아 선배들의 놀림감이 됐다.
아내가 옛 애인 앨범과 유품 간직케 한 대범한 마음
김백이씨는 설악산 석주길과 선인봉 요델버트레스 루트를 냈으며 토왕빙폭 등반 도중 추락사한 영웅신화의 주인공 고 송준호씨의 애인이었다. 김백이씨를 ‘까만 돌’이란 애칭으로 부르며 사랑하던 송준호씨가 죽고난 뒤 이경해씨는 동양산악회에서 김백이씨를 알게 되어 결혼까지 했다.
이경해씨는 김백이씨의 과거까지도 몽땅 사랑했다. 김백이씨가 옛 애인 송준호씨의 앨범이며 일기장, 작은 유품들, 이를테면 송준호씨가 까만 돌이라 부르던 그녀 대신 등반 중 품고 다니던 작고 까만 조약돌까지도 버리지 말고 고스란히 간직하게 했다. 목장 초원을 까불까불 손그네를 타는 아이와 더불어 산책하던 두 부부의 모습은 얼마나 다정했는지 모른다. 카메라 앞에서도 그는 아내를 바라보는 시선에 애정을 듬뿍 담곤 했다.
그렇도록 사랑했던 애인이자 아내인 김백이씨는 그러나 10년 전 덤프트럭과 충돌하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녀가 운전중이었고, 그는 옆에 타고 있었다. 만년설의 꿈 대신 아름답고 풍요로운 전원생활의 꿈을 품었다가 결국 아내마저 잃고 만 그는 전원을 떠나 정치 일선으로 나섰다.
결국 직접 정치가가 되는 것이 농촌 현실의 개선에 최선이란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장수지역에서 1,2,3대 도의원에 연달아 당선됐다. 그러나 작년 4·13 지방선거에서는 장수군수에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정부나 여론은 WTO를 앞두고 결국 농산물 시장은 대폭 양보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로선 막다른 골목이었고, 결국 온몸을 던진 마지막 저항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각료회의 개막식이라는,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시점과 장소를 용의주도하게 선택했다. 그의 세 딸은 이미 아버지의 죽음을 예견한 듯 소식을 듣고도 비교적 차분했다. 장녀 지혜씨는 아버지의 시신을 대하고 오래도록 눈물을 흘리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기려 WTO 협상 반대 시위가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시신을 인도하지 않겠다”고도 했다.
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 그는 혼자서 세 딸을 길러왔다. 그중 둘째인 고운씨의 결혼식이 9월28일로 보름여 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심장을 미리 예정한 장소에서 한 치 어긋남 없이 찔러야 했던 선배의 절박감이 그대로 가슴에 전해왔는지, 그의 동양산악회 후배 윤철상씨(45)는 전화기 저편에서 대성통곡하며 울었다.
댓글목록 1
장효건님의 댓글
대한민국이 한걸음씩 좋은사회로 갈수 있는것이이런분들의밑바닥에서의
나라 사랑 하는마음입니다.무엇이 잘못되고 잘됬건간에,이런일이 다시는일어나지 말아야 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