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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우울증*

이만호
2004.11.09 15:06 1,73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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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초입이었지만 아직 날씨는 무더위였었다. “나 오늘 닥터오피스에 갔었는데 내 병이 우울증이래” 우울증이 모두 안면에 몰려 있는 양, 혀 씹은 표정을 지으며 약 설명서를 읽어 보란다. 설명서는 뚜렷한 이유없이 장기간 피로감, 무기력, 의욕상실, 기분저하, 절망감등으로 염세적 사고를 지녀 자살충동까지 느끼는 병을 우울증이라 했다. 이러한 증상들을 족집게 무당의 점괘풀이라도 듣는 듯 연신 맞장구 치던 아내가 갑자기 하품하다 파리까지 씹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 본다. ‘네 마누라가 드디어 우울증까지 걸렸으니 정말 쌤통이다, 우울증의 발병원인은 바로 너다, 책임져라’. 통쾌한 복수전의 시작을 알리는 선전포고 의식같이 약을 탁 털어 넣더니 구미호九尾狐같은 얼굴로 또다시 나를 노려 본다. 그날부터 아내는 60억 인구 중에서 가장 슬픈 사람이 되었고 나는 30억 남자 중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었다.

금슬 좋은 부부는 서로 닮아 간다는데 우리는 같이 살면서도 다르게 살아 온 것 같다. 부부간 생리학적 사랑의 열정은 식었다 해도 상호 신뢰하는 믿음만은 긴 세월 유지할 수 있다고 믿어, 그 신뢰감을 깨지 않을 정도로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이 사는 게 중년 권태기의 위기를 넘기는 지혜인 줄 알았다. 그런 자기 합리화를 위하여, 두 기둥은 적당히 떨어져 있어야 집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자기 최면도 걸어 놓았고, 등산 중 나무나 바위에 몸을 다쳐도 그 나무나 바위와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철학적인 변명도 새겨두었다. 그래서 아내가 시비를 걸어 오면 먼산바라기 딴전이 싸움의 위기를 넘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었다. 요즘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가 아니라 칼로 살 베기라며 신경 끊듯 무시하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런 재갈물린 묵비권행사가 아내에겐 바위에 달걀치기처럼 원통하게 속 뒤집어졌는지 언제부터인가 주위 사람들에게 듣기 거북할 정도로 나에 대한 험담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화나 짜증이 잦아지며 희로애락의 정서적 관리가 불안한 행동특징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술까지 마셨다. 그래도 나는 그것이 애증후박愛憎厚薄이 섞인 일과성 히스테리 장애인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가족이나 건강, 돈에 대한 지나친 염려와 집착을 부리는 아내가 부담스럽고 짜증이 났다. 그런 아내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면서도 내 딴엔 악처 둔 철학자들이 많았음에 위안을 삼으며 나도 철학자가 될 조건이 마련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제 분수 지키며 만족한다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생활관을, 가난함에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道를 즐기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경지로 업그레이드 버전을 생각 중이었다. 그 일환으로 노자의 생긴 대로 저절로라는 무위자연無爲自然사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도덕경을 머리맡에 두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우울증은 이러한 구도행위를 순식간에 엿 같은 개똥철학으로 전락시켰다. 뿐만 아니라 논리적 사고가 더 이상 불가능한, 이성이 마비된 뇌사상태로 만들었다.

꽃은 남을 의식하지 않아도, 예쁘게 피어 있는 존재만으로도 사람을 즐겁게 하듯이 사람도 자기관리가 최선의 사랑이라 말해 왔다. 아내도 꽃같이 방끗 방긋하게 저절로 피어주길 바랬다. 그러나 꽃도 해와 비, 바람의 도움 없이 저절로 피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더구나 아내는 그러한 자양분 조건들을 나를 투사해서 받으려 했던 것이다. 그걸 귀찮아 무시했다. ‘가정엔 빵점’이라는 불평을 한국사나이의 역사적 숙명을 이해 못하는 여자들의 앙탈정도로 무시한 내가 뭐 안다고 행복에 대해서도 지껄였다. 행복은 선택이며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소한 것의 가치를 아는 것이다 며 행복 만드는 방법을 떠벌렸다. 내 옆의 여자는 나로 인해 비참한 삶을 사는데…. 더욱 가관인 것은 자연 친화적인 사고로 풀 한 포기의 섭리도 이해하자 며 늘 침 튀기며 떠들던 나의 그늘에서 아내는 버려지다시피 시들어가게 방치되었다는 사실은 웃지 못할, 아니 눈물 날 아이러니였다. 그간 일관되게 주장한 행복전도사의 글이 허구였으며 내 글과 현실의 괴리감은 나를 한 동안 정신적인 공황에 빠트렸다. 아내는 우울증, 나는 정신탈진증후군 환자 같았다. 여전히 아내는 내 앞에서 약을 탁탁 털어 삼키며 너 참 쌤통이라는 표정이다. 나는 그때 마다 번개에 감전된다.

어느 날 아내가 나에게 편지를 주었다. 너만 재미나게 살고 자기는 외로움과 서글픔에 눈물 짜는 삶이, 다 너 때문이라는 내용이다. 그간 써 놓은 편지가 많다고 했다. 우리에게 우째 이런 일이…..장탄식 중에도 그 동안 황당한 아내의 언행이 그 사람도 어쩌지 못하는 병의 증세였다니 어떤 면에선 위로가 되었다. 부부간에 엇박자 도 병이었고 나에 대한 분노와 공격성 험담도 병이라 생각하니 오히려 오해가 풀리는 해답을 찾은 것 같았다. 우울증은 약 먹으면 치유 율이 높다지만 재 발병 확률이 많다니 고민이다. 특히 가을에 증세가 심하단다. 약물치료와 함께 심리요법으로 명상 등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 좀 하자니까 왜 너는 안 변하고 자기만 변하라고 닦달이냐며 신경질을 냈다. 여태까지 자기만 희생 당하는 삶이였단다. 그래 아내는 환자지, 내가 변하여야 하지, 그런데 어떻게……다리를 주물러줘? 공주로 떠 받들어 모셔? 섹스횟수를 늘려? 방법을 모르겠다. 닭살 돋게 사랑한다며 호들갑을 떨 수 도…없고…
우리 휴가 내서 산에 가자. 개울가에 텐트치고 밥 해 먹는 곳에 며칠 갔다 오자, 추운데? 며칠 목욕도 못하고? 알았어 그럼 나중에 가자. 어디서부터 어떻게 변하지?…
소화가 되지 않는다고 숯을 먹는 것을 보고 업무차 타 주로 출장 갔을 때 전화하여 괜찮냐고 물었다. 전에 없던 전화짓거리를 고마워 했다. 출장 중엔 전화 꼭 하자, 좋아하니까,
또 물었다 어떻게 잘해주면 좋으냐고…돈을 더 벌어 오란다, 그건 무리지 갑자기 어떻게…. 하지만 쓸데없는 밤 외출을 줄일게, 일석이조 아니겠어?, 술 값 낭비하지 않아 좋고 둘이 같이 있어 좋고, 같이 있더라도 옛날같이 면박주지 말고 수다던 푸념이던 끝까지 들어주자. 밖에서는 남들을 잘 웃기는 남자가 왜 집에선 입 딱 다물고 있느냐는 추궁엔 할말도 웃길 소재도 없어 난감하지만, 우선은 그저 들어 주고 그리고 웃어주는 일부터 해 보자. 매일같이 나오던 내가 집에 있는 것을 친구들은 의아해 하겠지만 이 글을 읽으면 이해들 하겠지.
그러던 어느날 멋대가리 없이 소파에서 입을 딱 벌리고 골아 떨어져 자고 있는 아내의 얼굴에서 불현듯이 처녀적 서울서 계룡산 산장까지 굽 높은 구두신고 밤 늦게 찾아왔던 모습이 떠 올랐다. 당시 날건달 백수였던 나에게 운명을 맡겼던 예쁜 그녀가 변하긴 많이 변했다. 우리 그 때의 초심(When love loves love)으로 돌아 가 보자, 오늘 아침 비타민을 먹었나를 기억해 내는 것 같이 그녀와의 아름답던 추억장면을 매일 되새겨 보도록 노력하자. 지금은 몇 장면 안되지만 더 많이 기억해 내자, 추워져야 소나무의 푸른빛이 돋보이듯 우울증 아내가 새삼 소중하고 가엽다. 간병차원을 넘는 초심의 관계회복을 희망하며 노력할 것이다.

작용이 있으면 반드시 반작용이 있다더니 며칠 전 아내가 우울증 약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내가 잘해 주니까 약 먹을 필요가 없단다. 많이 호전 되긴 하였지만 그래도 약은 계속 먹어야 좋을 텐데, 약 복용을 거부하는 것도 우울증의 특징이라는 데… 한 밤중에 탱고 춤을 배우러 가자고 조르지 않는 걸 보면 낫기는 많이 나아졌다. 김치도 담그고 생선 간도 저리는 걸 봐선 많이 회복됐다. 명랑해 졌다. 코맹맹이 소리도 한다. 그래도 인내하며 조심스럽게 지켜 봐야겠지, 고통은 행복의 씨앗이라더니 마음에 심는 씨는 땅에 뿌리는 씨보다 빨리 자라나 보다.

에필로그: 어젯밤 선배님 댁에 저녁초대 받아 갔다. 평소 당신답지 않은 행동이 너무 이외라 내가 물었다. “아니 형님이 설거지를 다 해요?” “그래 한다” “불알 떨어지면 어쩌려고요?” “마누라가 이젠 떨어져도 괜찮다고 설거지나 하란다” 한국식품점에서 아는 후배가 인사하며 의아해서 내게 묻는다 “형님이 언제부터 카트를 다 끌어요?” “얼마 안됐다, 아직은 라이센스도 없는 무면허다” 너희도 곧 카트 끌어주고 설거지할 때가 온다. 어차피 할거면 즐겁게 해라. 이것도 재미 들면 괜찮아 질 것 같다



Gaang C: 이거야 원, 않그래도 돌산 꼭대기 에라도 올라가 "마누라가 않튼짓 한대요 " 라고 목청이 터져라고 외치고 싶었는데. . . . 어쩜 당신께서 대신 읊어 주셨나이까! ! ! 1 ! -[11/10-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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