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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은 자신이 키우는 독이다

이만호
2005.01.08 08:01 1,54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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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식당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께서 들려 준 이야기다. 그 아주머니는 남편이 그 식당 음식을 좋아하여 자주 따라 왔는데 그때마다 그 식당 주인 아주머니가 웬 지 모르게 밉게 느껴지는 경험을 하였단다. 크게 잘 못한 것도 없는데 그냥 얄밉게 생각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떠 오른 기억하나가 그 미움을 설명하여 주었다. 자기가 처녀 때 크게 싸우고 상처 주며 헤어 진 나쁜 계집애의 모습과 그 아주머니가 흡사하다는 것이다. 잊고 싶은 모습이었지만 기억 저편에 각인되어 있다 무의식 중에 그 식당 아주머니에게 까닭 모를 미움으로 투영 된 것이다. 그 설명을 들은 식당 아주머니도 그 손님의 심통 사나운 태도가 맘에 들진 않았지만 이민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성 투정 같아 크게 맘 쓰지 않았단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몇 년 전 비슷한 경험이 있어 소개한다.

내가 매일같이 즐겨 오르는 곳이 스톤마운틴이다. 공원당국이 많은 예산을 들여 관리하는 지역일지라도 이용하는 사람이 많다 보니 쓰레기가 나오기 마련이다. 특히 등산로(Walk-up Trail)엔 버린 휴지와 음료수 병들이 군데군데 보일 때가 많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산을 오르내리며 눈에 거슬리는 쓰레기를 줍기 시작하였다. 어떤 때는 정겹게 대화를 나누던 바위와 나무, 풀 잎사귀는 안중에도 없고 쓰레기만 보였다. 나무가 헐벗어 시야가 트인 겨울엔 쓰레기가 눈에 확 들어왔지만 잎이 무성한 여름철엔 가려지기 쉬워 주을 쓰레기를 찾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어느 봄날 한 무리의 죄수들이 흐느적거리는 동작으로 쓰레기 줍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나와 저들의 쓰레기 줍는 행위가 어떻게 다를까 생각하여 보았다. 그들은 부여 받은 작업의 일환이지만 나는 자발적으로 쓰레기를 주었다?. 내가 자칭 환경 지킴이라서? 뭔가 석연치 않았다.
쓰레기 줍는 동기를 분석하던 나는 점점 불쾌한 감정으로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나의 잠재의식에 숨겨진 이기적 동기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쓰레기를 줍는 그 의식 밑 바닥엔 쓰레기를 버린 사람들에 대한 증오가 깊게 깔려있었고 그 사람들을 징벌하는 응징 심보가 공익행위인척 포장 된 것이다. 몰상식한 공중도덕에 대응하는 원망이, 쓰레기채집을 선악대비 같은 우월감까지 느끼도록, 사탕 빨듯한 자기 합리화 최면을 걸고 있었다.
에너지는 사랑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미움에서 생기는 것이 더 크고 강하고 맹목적이다. 상대를 의식한 보복 심보는 정겹던 풀 잎사귀와 하늘까지도 안보이고 쓰레기만 보였다. 꽃밭에서 잡초만 헤아리는 격이었다. 환경지킴이 어쩌구는 착각 아니면 위선이었다. 쓰레기 줍기를 한동안 중단하고 작위적일 정도로 이 문제를 화두 삼아 철저한 동기점검을 하여 보았다. 그러다 더 깊은 잠재의식 심저에 똬리를 틀고 있는 불특정 다수에 대한 막연하고도 지독한 미움을 알았을 땐 전기에 쏘인 것 같은 화끈함을 느꼈다. 불특정 다수라는 미움의 대상은 쓰레기를 버린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산을 오르는 모든 사람이었다.

나는 등산에 관한한 알피니즘을 신봉하고 전도하는 혈통 좋은 산악인이라는 우쭐한 자부심이 있었다. 우리가 등산을 시작한 60년대 초는 무전여행이 성행하던 때였다. 우리와 그들은 다 같은 거지꼴로 차림새가 비슷하여 민폐 끼치는 그들과 구별하기 위해서라도 등산자는 서구적인 알피니즘으로 정신무장하며 무전여행자와 차별을 의식화하였다. 200년 전까지만 해도 알피니즘의 발상지인 유럽 알프스의 산은 악마가 사는 곳으로 사람들이 믿었기 때문에 알피니즘 여명기엔 그 높은 산들은 상금까지 걸며 도전해서 정복하여야 할 대상이었다. 목숨 걸고 싸워야 할 극복대상 이었다. 우리 조상 선비들이 산과 더불어 지냈던 숭산 사상과는 산에 대한 개념이 달랐다. 당시 어린 혈기로는 보다 큰 어려움 극복을 추구하는 도전스포츠로 발전한 서구 알피니즘에 매료되어 몰두한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러한 인식과정을 거친 정서는 정통이라고 믿는 것과 다른 것은 모두 날나리라는 중뿔난 고정관념을 만들었다. 나이 들어 온 맘 온 몸을 내 던지던 도전등반보다는 산에서 안식과 평화를 찾는 입산수준의 산행을 하면서도 알피니즘은 잠꼬대처럼 튀어 나왔다. 등산이 건강에 아주 좋은 것은 몸의 단련만이 아니라 마음세척이라는 정신건강 효과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은 건강상 아주 밀접하게 상호 작용하기 때문에 이 모두를 충족시키는 운동으론 등산만치 좋은 것이 없다. 인자요산(仁者樂山) 이라는 말도 있고 앨티튜트(Altitude-높이) 보다 에티튜드(Attitude-태도) 라는 마음가짐을 강조하는 등산격언도 있다. 그런데도 나의 단단한 고정관념은 나와 다른 등산객을 보면 조건반사적으로 기분이 나빠졌다. 미국엔 Hiker(보행위주 산행자) Back-packer(캠프성 산행자) Mountaineering(스포츠성 등반자), Climber(손발을 모두 사용하는 빙설암 등반자)들이 우열이 아닌 취향이 다른 가치관을 갖고 산에서 시새움 없이 공존한다. 더구나 내가 날라리라 분류하는 하이커들의 Pack it in, Pack it out(쓰레기 처리방법) No trace(흔적 없는 산행) 정신은 본 받기도 하였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일 뿐 옳고 그르거나 맞고 틀리는 차원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유독 스톤마운틴에서 만은 유아독존이었다. 한때는 사람들을 피해서 보이지 않는 밤에 올라 다녔다. 그러나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그 산은 공원이다, 웃통 벗고 수박 배 내밀고 뒤뚱거리는 사람, 코끼리 몸집에 돼지발굽 구두신고 오르는 사람, 휴대전화로 떠드는 사람, 기타 치며 노래하는 사람, 맨발로 뛰는 사람 그야말로 날나리 천국이다. 나도 그 산을 알피니스트로 오르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들과 똑 같은 건강유지 목적으로 오른다. 그런데 이게 뭐야? 나체 촌의 턱시도차림 같이… 차라리 절에서 찬송가 부르는 게 낫지, 다리에 나야 할 쥐가 머리에 났지만 미움의 실체를 알고 나니 해결책은 간단했다. 나와 다른 것에 대한 거부감은 내가 만들어 낸 미움이기 때문에 상처 받은 상대가 없어 제거방법도 간단했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나만 변하면 되었다. 변한다는 것은 그들과 같아 지는 것이다. 모두와 같아 지는 것이다. 가장 편한 마음으로 같이 걷고 같이 웃는 것이다. 같이 인사하는 것이다. 하니까 나무도 풀도 바위도 웃었다. 변화에서 오는 제일 큰 수혜자는 나인 것 같았다. 내가 변하니 사람들이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다. 쓰레기는 산을 사랑해서 줍는다. 산에 바친 봉헌물 같이 생각하며 줍는다. 산이 나에게 조건 없는 행복을 주는데 나도 산에게 조금이라도 헌신 하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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