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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말로리와 에베레스트

이만호
2005.03.29 08:50 3,22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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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거기 있기에"의 명언을 남긴 조지 말로리를 통하여 본 에베레스트 등정사

1920년 인도 정부의 부왕과 티베트의 달라이라마에게 입산 허가를 받은 영국의 에베레스트 1차 원정대는 인도의 다이질링으로 들어갔다. 이원정대의 목적은 에베레스트 베에스 캠프로 가는 길과 등반 루트를 정찰하는 것. 이원정대는 카라반 도중 희말라야 경험이 많은 겔라스발사가 병으로 사망했다. 다음 날 에베레스트를 발견한 원정대는 카라반을 계속해 팅그리라는 부락에 도착해 본부를 설치했다. 당시 이들 원정대 대원 4명 가운데 켈라스발사는 이미 죽고 다른 한명은 병이 들어 말로리와 볼로크만 남았다.

말로리는 영국 체셔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잠시 일했다.그는 재학시절 당대 최고의 등반가인 어빙과 홋날 영국 산악회 회장이 된 제프리 영에게 등산기술을 배워서 알프스 등산에 나섰다.

말로리는 등반 기술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신뢰를 받고 있는 당시 영국 산악계에서 가장 우수한 등반가로 손꼽히는 인물로 "산이 거기 있어 산을 오른다"는 명언을 남겼다. 두 대원이 에베레스트 최하단에돌출된 로부츠빙하쪽을 정찰했으나 그윗부분이 3000미터의 수직벽이어서 등반불가판정을 내렸다. 이들은 로라라고 불리는 북서릉안부에 올라 네팔쪽 등반로와 서릉에 대해서도 등반이가능하지 않다는 판정을 내렸고 남동릉과 그출발지점인 사우스콜을 관찰하려 했으나 볼 수 없었다.

9월24일 이들은 북릉의 안부인 노스콜에 올라 정상까지 이어지는 루트를 확인하고 4개월에 걸친 대탐사를 마치고 귀한했다. 이후이노스콜은 수차례에 걸친 에베레스트 등반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1922년 등반 목적으로 조직된 영국 제 2차 원정대는 5월 1일 롱부크빙하의 하단부에 베이스 캠프를 설치하고 4캠프를 설치하고 4캠프를 노스콜에 설치해 전진기지로 삼았다. 5월 20일 새벽 4명의 대원과 9명의 셀파가 무산소로 4캠프를 출발해 5캠프를 설치했다.다음 날 등반에 나선 이들은 1명이 낙오하고 3명도 고소증세를 보여 8225미터 지점에서 돌아섰다.

5월25일 2차 공격을 실시한 흰층 일행은 산소통을 메고 노스콜을 출발해 5캠프를 더높은 곳으로 옮기고 셀파들을 내려보냈다. 그날부터 폭풍설이 휘몰아쳐 꼼짝 못하고 있던 이들의 8326미터까지만 전진하고 귀환한다. 2차 정상 공격이 실패하자 6월 5일 3차등정에 나선 원정대는 4개조로 나뉘어 노스콜을 등반하던 중 눈사태가 상단부에서 발생했다. 이때 밑에서 오르던 셀파 9명이 눈사태에 밀려 그레바스에 묻혀 7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생겨 3차 원정대는 쓰라린 패퇴를 하고 만다.

1923년 3차 원정대는 부르스 대장이 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노튼이 대장을 맡게 되었다. 노스콜 밑까지 쉽게 전진한 원정대는 그위의 꿀르와르에 이르지 못하고 일시후퇴하는 도중 고소 포터들이 동상과 페렴, 골절등으로 급기야 2명이 사망했다. 원정대는 이들의 사기 진잘을 위해 롱부크사원의 노승으로부터 기도를 받고 전진캠프인 4캠프건성에 들어 갔지만 폭설이 내려 4명의 셀파가 4캠프에 고립되었다. 이소식을 접한 노튼 대장과 말로리, 쉬베르는 이들 셀파를 구하기 위해 헌식적인 구조에 나서 셀파 모두를 구조하는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 말로리 정상부근 안개속으로 사라져 **

잠시 베이스 캠프에서 휴식을 취한 원정대는 1차 공격조로 말로리와 부르스을 임명했다. 이들은6월1일 9명의 셀파를 데리고 7710미터 지점에 5캠프를 설치하고 더오르려 했으나 고소 경험이없는 셀파들이 등반을 거부하는 바람에 이들을 데리고 내려왔다 원정대는 셀파들을 장기간 설득해 4명의 셀파가 6캠프까지 짐을 올렸다. 노튼과 솜마벨은 산소도 없이 6캠프(8170미터)까지 짐을 올렸다.

노튼과 솜마벨은 산소도 없이 6캠프에서 하릇밤을 지내고 다음 날 새벽 정상 공격에 나서 옐로우 배든을 따라 등반을 계속했다그러나 12시경 꿀르와르에 다가섰을 때는 산소가 부족해 육신이 몽롱해지자 솜마벨은 뒤로 처지고 노튼 혼자 등반에 나섰다.그러나 그는 8572미터까지 전진한뒤 돌아오고 만다.

1차공격에 실패한 말로리는 옥스퍼드대학에 재학중인 어빙과 함께 등반에 나서면서 오델에게 지원을 부탁하고 코닥카메라를 베낭에 넣었다.6월6일 말로리와 어빙은 셀파 8명을 데리고 노스콜을 출발해 5캠프까지 전진했다. 5캠프에서 4명의 셀파를 내려보낸 말로리 일행은 6캠프에서 도착해 나머지 셀파를 하산시켰다. 6월8일 산소장비를 메고 정상을 출발한두사람은 그날 밤이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들을 마지막 목격한 이는 지원을 맡은 오델 한사람뿐이었다.

오델은 말로리 일행보다 하루 늦게 노스콜을 출발 5캠프에서 하루를 자고 말로리 일행이 정상을 떠나던 날 6캠프를 향해 올랐다. 그날 아침 날씨는 맑았지만 언제부턴가 아래쪽에 안개가 끼어 있었다. 그러나 7900미터지점에 도달했을 때 갑자기 안개가 걷히면서 에베레스트 정상 부근이 한눈에 보였다. 그때 멀리 움직이는 작은 사람들이 보였는데 위사람은 피라미드 바위로 접근하고 있었고 그 뒤를 다른 사람이 따르고 있었다.

잠시뒤인 오 후 12시50분경 위사람이 제2스템위에 도착했다. 오델이 이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동안 다시 안개가 끼면서 이두사람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고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6캠프에 도착한 오델은 60여미터를 더 올라가 두사람을 큰 소리로 불렀으나 대답은 없었다. 약 2시간이 지난 뒤 에베레스트 상단부 바위가 뚜렸이 보였으나 말로리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그다음 날에도 돌아오지 않자 두사람의 죽음은 기정 사실화 됐다.

** 6캠프 부근에서 발견된 말로리**

원정대가 귀국하자 말로리와 어빙의 장례는 센트폴교회에서 국장으로 치루어 졌다. 이날 장례식에는 국왕을 비롯한 각계 요인이 참석해 이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 이후 영국 원정대는 1933년 4차 원정대를 파견 6캠프를 떠나 1시간을 오른뒤에 어빙의 피켈로 여겨지는 한자루 피겔을 발견했다. 이들은 전진을 계속해 꿀르와르 까지 왔으나 체력이 다 떨어져 8500미터 지점에서 돌아섰다.

5월 31일 2차 공격조인 스미드와 쉽튼은 산소없이 6캠프를 출발해 8572미터인 꿀르와르까지 스미드가 진출했지만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돌아와 4차 원정대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영국 산악의 에베레스트 원정은 1935년 5차 원정대 실패 6,7차 원정대의 좌절을 거듭했다. 1951 년 가을 8차 원정대는 에베레스트남측의 웨스턴 쿰까지 진출해 로체 설사면을 타고 사우스콜로 가서 남동릉을 타면 정상에 설 수 있다는 확신을 안고 귀국했다.

1952년 8명의 대원과 2명의 과학자가 주축이 된 스위스 1차 원정대는 에베레스트을 처음으로 도전한다. 이원정대는 5월28일 정상도전을 위해 등반에 나서 강풍을 동반한 눈보라 속을 뚫고 등반했지만 8595미터 지점에서 돌아설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가을, 알프스에서 맹활약하는 가이드들로 조직된 스위스 2차원정대는 11월 19일 사우스콜에 도착 8캠프를 설치했다. 다음 날 3명의 대원이 강풍과 혹한을 뚫고 출발했으나 8100미터에서 하산해 스위스 원정대는 에베레스트 초등 기회를 영국에 물려주고 만다.

1953년 영국 9차 원정대는 5월 26일 1차 공격조인 에반스와 보디롱이 등정에 나섰으나 남봉 지점에서 돌아섰다. 2차 공격조인 할라리와 텐징은 5월 29일 오전 6시 30분경 9캠프를 출발 남봉을 거쳐 어려운 스텝(할라리 스텝)을 넘어 오전 11시 30분 에베레스트 초등에 성공했다. 영국 산악회의 에베레스트 초등은 전파를 타고 전세계에 알려졌고 영국은 축제 분위기가 며칠이나 계속 되었다.

--아래 사진은 페루 원정팀이 오를 Huandoy산군 네개의 봉우리 중 일부
왼편은 남봉이고 우리의 목표는 서봉으로 사진 가운데 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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