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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등산과 알피니즘 - 1.5 알피니즘의 태동

산악회
2004.04.13 23:24 3,512 0

본문

1. 등산과 알피니즘


1.5 알피니즘의 태동



샤모니 몽블랑지역의 개요와 기원


<샤모니계곡>

알프스산맥은 가장 높은 몽블랑(4807M)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부터 프랑스 지중해 연안 니스에 이르기까지 장장 1200km에 달하는 유럽 최대의 산맥으로 약 600만년전 지각의 대변동에 따른 굴절 변화에 의해 형성되었다. 알프스의 어원은 올프(Aulp)라고 하는 (방목을하는 목장) 말에서 부터 유래되었으며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지방에서는 다양한 기후조건과 풍성한 초목으로 임업과 목축을 주업으로 하고 있다.
알프스산맥은 크게 북쪽과 남쪽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북쪽은 대양성기후의 영향으로 많은 강우량과 저기온으로 궂은 날이 지속적으로 이어질 때가 많으며 기온변화가 심한편이나 남쪽알프스는 지중해성 영향을 받아 온화한 기후와 얕은 산세가 지중해지역으로 근접할수록 우리나라 산과 아주 유사한 모습을 연상케하는 곳도 있다.
프랑스 알프스는 스위스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레만호에서부터 시작되며 약200km의 폭으로 니스까지 370km에 이른다. 최고봉인 몽블랑은 이태리와 국경을 이루고 있고 정상이 올려 보이는 샤모니(1035M)는 산악인의 메카로서 년중 가장 많은 등산객과 광광객이 찾아드는 명소로 알프스의 심장이라할 수 있다.

현재 행정구역상 프랑스 오뜨 사브아 지역에 속해 있는 샤모니 계곡은 발므에서 보자까지 23km의 길이를 얘기하며 약200만년전 제4기 빙하기시절에 얼음 덩어리에 의해 깍여 지면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최근 약1만년전까지 계곡을 덮고 있던 얼음이 녹으면서 골짜기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는데 워낙 산세가 험하고 지형이 복잡해서 11세기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이 골짜기에 발을 들여 놓을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샤모니가 알려지기 시작하게된 것은 제네바지역을 다스리던 에몽이라고 하는 영주가 (1090년경) 자신에게는 쓸모없던 이땅을 카톨릭 수도자들에게 기증하게 되고 소수의 수도자들이 이곳에 수도원을 건축하고 정착하면서 부터다. 하지만 극히 짧은 여름과 혹독한 기후 그리고 진입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이 골짜기에서 사람들은 오랫동안 외부세계와는 단절된 상태로 가혹한 자연환경과 함께 스스로 생존하는 법을 배우며 비참하게 살아야만 했다.
당시 중세유럽의 교황과 카톨릭은 모든 국가와 백성들에게 정신적 지배자로 절대적 위치와 존재로 군림했으며 국가와 백성들은 교회와 교황청에 반드시 세금을 납부해야하는 의무를 지고 있었다. 하지만 샤모니만은 공제 수확물에 대해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세금을 감면또는 면제받고 있었는데 일부성직자와 특권층 귀족을 제외하고는 절대 불가능한 이 면세 혜택은 교회에서 특별히 눈감아준 것이 아니라 샤모니 사람들이 굽힐줄 모르는 용기와 끈질긴 투쟁으로 오랫 동안 싸워서 교황청으로 부터 얻어낸 그들의 이득이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이 지역 사람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끈질기며 강인한 성격과 전통적 보수성 기질은 아마 이런 어려운 생활환경과 투쟁의 오랜 역사에서 비롯된듯하다.(당시로서 수확물에 대한 면세요구는 교회로부터 파면 당할 수 있는 위험한 일로 얼마나 샤모니의 생활과 환경이 생존하는데 열악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외부 사람들의 발길이 샤모니를 찾기 시작하는 것은 1860년 나폴레옹3세가 왕후와 함께 사브아지방 순방차 이곳을 지나며 험난한 계곡 진입로를 노새와 가마가 통과할 수 있도록 정비하게 되고 이후 몽블랑을 보다 가까이서 전망하기 위한 일부 상류층 신분의 여행객들이 시종과 함께 먹을 것을 가득 실은 노새를 이용하여 찾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알피니즘의 시작

<1900년경 몽블랑을 전망하기 위해
쁠랑쁘라를 오른 관광객들>

샤모니를 둘러 싸고 있는 셀수 없는 첨봉들의 암반속에는 진기한 빛을 발하는 고귀한 천연수정들이 숨겨져 있다. 샤모니에서 발굴되는 이 수정들은 높이의 차이에 따라 색깔을 달리하는 특색을 지니고 있는데 당시 채굴자들은 특별한 등반장비도 갖추지 않은채 수정을 찾아 발길이 닿지 못하는 높은 봉우리까지 서슴치 않고 오르기 시작했다.(샤모니의 수정은 높은 곳에서 발굴될수록 색깔이 더욱 아름답다.) 진정한 등반을 직업적인 그들의 행적부터 정리할 수는 없지만 기록에 남지 않은 많은 봉우리들을 그들은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직업적인 채굴자로서 그들의 등정과 산행을 우리는 알피니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빙하를 건너고 어려운 암벽을 오르는 그들의 지식과 기술은 이후 순수하게 몽블랑을 오르기 위해 샤모니를 찾는 많은 등반가들의 좋은 길잡이가 된다. 예로 알프스 등산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긴 몽블랑 초등자 쟉 발마는 등반가라고 하기보다는 샤모니의 직업적인 수정 채굴자였다.
그러면 샤모니의 순수한 알피니즘으로서 등반은 언제부터 시작되는가? 바로 1741년 영국인 포콕과 윈드햄에 의한 몽탕베르(1909M) 등정부터이다. 모험가와 군인이었던 이 두사람은 제네바에 여행을 왔다가 멀리 보이는 몽블랑 (하얀산이라는 뜻)에 매료되어 샤모니를 찾게 되는데 당시만 해도 절벽과 원시림으로 진입이 극히 어려워서 3일 만에야 샤모니에 도착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수도원장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몽탕베르를 오르는데 이후 이 등정기록은 샤모니에 새로운 등반열기를 몰고 오는 동기가 된다.
그리고 1760년 제네바의 자연과학자인 오라스 베네딕뜨 드 소쉬르는 혼자서 몽탕베르와 브레방(2525M)정상을 단숨에 오르고 나서 당시만 해도 미지의 세계로 접근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 왔던 얼음 구덩이와 눈으로 덮인 몽블랑 등정의 가능성을 확신한 후 제네바로 돌아 온다. 하지만 당시 제네바에서 상당한 재력가로 알려진 소쉬르는 수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원정과 도전에도 불구하고 몽블랑 등정의 꿈을 이루지 못한다. 결국 그는 몽블랑에 대한 열정을 누구든 자기 대신 정상을 오르는 사람에게 사례하겠다는 상금을 내걸게 되고 1786년 8월 8일 두명의 샤모니사람에 의해 몽블랑의 첫등정은 이루어진다.

<샤모니시내에 있는 몽블랑 초등자
미셸 갸브리엘 빠꺄 동상과 몽블랑>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샤모니 최초의 의사 미셸 갸브리엘은 수정채취자인 쟉 발마를 조수(현재의 산악가이드)로 몽블랑 등정을 위해 8월7일 샤모니를 출발한다. 그리고 다음날 오후 6시 23분 그들은 처음으로 당시로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알프스 최고봉의 정상에 도착한다. 이들의 모든 등반과정은 샤모니에서 망원경으로 자세히 관찰되고 기록되었다.
두사람의 초등소식을 전해 들은 소쉬르는 몽블랑을 오르는 꿈을 잊어버리지 못하고 이듬해 다시 대규모의 원정팀을 구성해서 몽블랑 정상을 밟게 되는데 이때에도 타고난 체력과 뛰어난 재능을가진 쟉 발마가 그들 원정의 길잡이를 했다. 어쨌던 2등을 했지만 소쉬르는 몽블랑에 대해 남다른 열정과 등정의 욕망을가지고 제네바에서 부터 수십년간 셀 수 없이 샤모니를 오르 내리며 새로운 알피니즘에 불을 당겼다. 당시 소쉬르는 과학자답게 과학적 관찰을 목적으로 많은 인원과 과학 장비를 가지고 연구원정등반을 하였는데 이때 그가 남겨 놓은 관찰기록들은 이후산악등반의 선구적인 기술적 자료들로 남게된다.
이후 몽블랑은 새로운 기록들을 세우기 위한 많은 알피니스트들이 찾기 시작하고 1808년에는 마리 파라디라고 하는 처녀가 샤모니에 들렀다가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몽블랑을 오르는데 가이드의 등에 업히고 밀려서 정상에 오른 그녀는 거의 반주검이 되어 샤모니로 돌아 온다. 이 여성 초등기록은 순수 알피니즘에 의한 등반이라할 수 없다.
알피니즘에 의한 첫 여성등정은 1838년 앙리엣 당즈빌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그녀는 처음부터 몽블랑 등반을 준비해 왔고 샤모니 가이드들도 놀랄 정도로 치밀한 계획과 꼼꼼한 등반으로 나중에 가이드들로 부터 몽블랑의 아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이렇게 몽블랑의 등정이 여러 차례 걸쳐 성공하게 되고 샤모니는 모험을 즐기는 탐험가와 새로운 봉우리를 찾아 오르려는 많은 알피니스트들의 발길들로 이어지기 시작하자 이 지역의 산세와 기후를 잘 알고있는 샤모니 수정채굴자들은 자연히 그들의 유급 길잡이로 나서게 되고 나중에는 직업적인 산악가이드로 탈바꿈하게 된다.
드디어 1821년에 샤모니 산악가이드협회가 (초창기는 샤모니 산악동지회라 일컬었음) 결성되고 샤모니는 알피니즘의 중심지로 변모하게 되며 더욱 많은 등반가들이 샤모니로 모여 든다. 등산의 붐이 일기시작한 18세기 후반부터 샤모니를 찾은 등반가는 거의 대부분 1857년 설립된 영국 산악회소속의 영국인들이었다.
대표적으로 영국에서 건너온 에드워드 윔퍼는 1860년부터 1871년 사이 샤모니의 수많은 첨봉들에 초등기록을 남기면서 그의 새로운 암벽등반기술을 선보이게 되고 그를 통해 샤모니에는 더 많은 어려운 첨봉들을 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낳게 한다. 이렇게 불붙기 시작한 알프스의 등반열기는 스위스의 마터호른 초등을 계기로 알피니즘의 황금기를 맞게 된다.

[참고] 알피니즘이란 알프스의 봉우리를 순수하게 등반을 목적으로 오르는 새로운 사상.
알피니스트는 알피니즘을 추구하는 등반가.

몽블랑의 빙하
옛날 이지역 사람들은 몽블랑을 신의 저주를 받은산 이라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몽블랑 정상에서 샤모니로 흘러 내리는 여러 빙하는 재난과 재앙을 불러 일으키는 공포의 대상으로 악마가 서식하는 지옥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이론으로 빙하의 발달과 생성과정이 밝혀지기전 빙하 속의 거대한 얼음탑과 갈라진 무시무시한 크레바스의 생김새는 충분히 옛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문명의 발달로 빙하의 비밀이 벗겨지고 많은 탐험가와 등반가들이 빙하를 오르내리면서 빙하는 더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자연이 빚어 놓은 조화와 현상으로 이해되자 이 아름다운 경관을 보기 위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게되는 새로운 명소로 바뀌게 된다.
지금은 기후변화로 인하여 빙하의 규모와 크기가 많이 줄어 들었지만 1741년 처음으로 포콕과 윈드햄이 몽탕베르에 도착해서 보았던 어마어마한 빙하는 현재 등산열차 역사가 자리한 곳보다 더 높은 빙탑들이솟아 있었다. 그들은 이 빙하를 보고 큰 바다가 심한 폭풍우로 순식간에 얼어 붙은 파도와 같다고 기록을 남겨 놓았다. 그 이후 이 빙하를 메르 드 그라스(빙하의 바다)라 부르게 되는데 표고차 3000미터의 차이를 가지고 폭1200미터 총7000미터 길이로 샤모니 마을까지 펼쳐진 프랑스 최대 빙하다.
메르 드 그라스 빙하는 때에 따라서 규모가 커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1590년과 1645년사이 지속적인 대기 온도의 강하로 1645년겨울에는 전유럽을 강타한 극심한 추위가 빙하의 움직임을 급속도로 빨리하여 샤모니계곡을 완전히 갈라 놓았다. 이 재해를 샤모니 사람들은 악마의 장난으로 생각하여 제네바주교를 찾아가 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올리게 되는데 어쨌던 그 이듬해 온화한 기후가 다시 찾아와 빙하는 재해 이전의 상태로 다시 줄어 들었다. 기록에의 하면 1645년경 빙하는 최고로 증가하고 그 다음은 1850년경 그리고 가장 심한 감퇴 현상은1955년부터 현재까지이며 지금도 빙하는 계속해서 줄어 들고 있다. 아마도 공해에 의한 대기 온도상승으로 이상 현상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라고 자연보호주의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1840년경 한 화가가
그린 메르드 그라스의 모습>

그러면 빙하는 어떻게 해서 생겨나고 활동하는가? 고산의 눈은 매우 건조하고 차갑다. 몽블랑 정상 10미터 깊이의 눈은 영하20도 정도나 된다. 그리고 3600미터 암봉주변의 지형은 바람의 방향에 따라 많은 량의 눈이 쌓이는데 몽블랑 정상이나 3000미터 주변의 쌓인 눈은 낮에 강한 햇볕에 의해 표면부터 녹으면서 젖기 시작하고 녹은 눈은 섭씨10도까지 상승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그 위에 새로 쌓이는 신설에 의해 녹은 눈은 다져 지면서 굳어진다. 이런 계속적인 현상은 약 30미터깊이 (15년걸림)정도에 이르면 물도 통과할 수 없는 매우 견고한 얼음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중력에 의해 밀려나기 시작하는 이러한 두꺼운 얼음층들은 해발 2700미터에 이르러 갈라지면서 빙탑을 형성하게 되고 무너지는 빙탑들은 다시 아래로 밀려 나면서 크래바스를 만들어 놓는다.
빙탑과 크레바스는 산새의 굴곡에 따라 높이와 크기가 달라지는데 급경사 일수록 횡단으로 갈라지며 틈이 벌어지고 완만할수록 틈은 좁아든다. 그리고 돌출부가 있는 곳에서는 수직의 빙탑이 형성되고 기복이 심하면 붕괴된다. 새로 쌓이는 신설의 무게와 중력에 의해 움직이는 빙하의 유속은 지형에 따라서 다르지만 평균 약 시속 1Cm의 속도(1년에100미터정도)로 아래로 흘러 내린다. 이렇게 움직이는 빙하는 많은 암반과 조각들을 계곡 아래로 운반하는데 얼음 사이에서 떨어진 암석조각들은 일정한 띠를 형성하고 이 흔적들은 빙하의 흐름에 따른 곡선과 일치하며 가장자리보다 중심부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 띠들은 수십년 동안 빙하흐름의 속도변화를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연구자료로 쓰인다.
19세기 어느 알피니스트가 등반중 잃어버린 장비를 우연하게 몇 년후 빙하 하류에서 발견하면서 빙하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게된 이 놀라운 현상은 빙하의 생성시기와 시대적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큰 도움이 될뿐아니라 더이상 악마가 서식하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후 1879년경 몽탕베르에는 호텔과 식당이 들어서게 되고 빙하를 연구하기 위한 자연과 학자들은 이곳에서 자료수집과 측량을 통해 수많은 연구기록들을 발표한다.
이렇게 해서 빙하의 비밀이 벗겨지자 사람들은 자연이 빚어놓은 최고의 걸작품인 빙탑과 얼음동굴들을 보기 위해 메르 드 그라스가 있는 몽탕베르를 오르기 시작하고 샤모니의 산악가이드와 가마꾼들은 빙하를 건너는 그들의 길잡이 가된다. 19세기 나폴레옹3세와 그의 왕후 유제니까지 다녀간 몽탕베르와 메르 드 그라스 빙하는 1908년에 이르러 최초의 등산열차가 개통되면서 알프스의 최고 관광코스로 발전한다. 현재 샤모니 계곡의 대표적인 빙하는 가장 큰 메르 드 그라스빙하 표고차가 가장크고 유속이 제일 빠른 보쏭빙하(표고차3600미터 유속하루에 약1미터)와 타코나빙하 그리고 아르장티에르빙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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