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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때 찾은 사랑

이만호
2004.07.02 05:32 1,26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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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짐을 정리하다 까맣게 잊을 정도로 쳐 박아 두었던 두루마리 편액을 발견하였다. 세월의 때로 누렇게 변색된 이 편액은 한때 사랑의 열락을 같이 했던 여인이 인편에 보내 온 결혼 선물이었다. 초서 체로 흘겨 쓴 문장이라 나의 결혼을 축하한다는 건지 원망한다는 건지 글 뜻은 그 때나 지금이나 알 수가 없지만 작가의 이름과 호의 낙관은 그녀의 단아한 모습을 회상하기에 충분했다. 30년 넘은 작품이라 낙관의 인주 색은 검붉게 변색 되었지만 오랫동안 괄호 속에 묶여 있던 애틋한 기억들이 아직도 진홍색 애련으로 인화되듯 되 살아 남이 놀랍다. 흑과 백 뿐인 수묵화에서 유난히 빛나는 진홍색 낙관, 선명한 진홍 인주 색 같은 삶을 살고 싶다던 그녀, 서예와 그림을 해서 그런지 마르지 않는 윤택한 정서가 흐르고 있었다. 나를 미술전시장으로 오페라공연장으로 서예학원으로 자기 집으로 당기고 밀며 꿈꾸듯 행복해 하였다. 촛불을 좋아했고 촛불보다는 별을 더 좋아하였다. 그녀는 종종 밤 하늘의 별자리를 이야기하였지만 나는 내내 맞장구 칠 수가 없었다. 당시 나는 수표 부도로 숨어 지내던 절박한 시절이었다. 그녀는 내가 짊어 진 가난의 무게는 무서워하지 않았지만 내 정신의 황폐함에 절망하고 분노하였다. 수묵화의 진홍 인주 색 같다던 우리 사랑은 개화 절정에서 송이채 떨어지는 동백꽃마냥 상처만 남기고 끝났다. 미완성 사랑에 대한 비련의 추억은 대부분 미화되어 각인된 수가 많다. 편액의 글씨를 한자 한자 쓰다듬듯 살피는 나에게도 연민한 기억의 편린들이 한 여름 밤의 부채바람처럼 솔솔 피어나고 있어 아내의 기척도 몰랐다. “뭐 하슈??” 살랑살랑 일어나던 부채의 연풍戀風은 선풍기 바람 같은 아내의 기세에 화들짝 놀라 멈췄다.

“너희 아빠 같은 사람과 결혼하지 마라, 평생 속 썩는다” 아내가 딸 아이에게 하는 당부다. 내 비록 사랑한다, 미안하다는 말은 쑥스러워 잘 못하지만 함께 한 인고의 세월동안 걸러지며 담가진 담담한 맛의 사랑이 있다고 자부하는 나에게 아내의 오도계悟道戒성 당부는 엽기적 충격이었다. 이 여자와 왜 사나 싶었다. 안 살더라도 평판 나빠서 재혼도 못할 거 같은 걱정도 생겼다. 옛날 같으면 살기등등한 시비거리 소재였지만 못 들은 척 넘어갔다. 그러잖아도 우리 부부는 큰 일을 앞두면 으레 언쟁을 벌인다. 대개 나의 고함 하나로 사태가 일순 제압되긴 하였지만 점점 아내의 눈에나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 요즘엔 내가 꼬리를 내리는 때가 많아지고 있다. 나이 먹으면서 남자 여자의 호르몬 분비가 바뀌어서 그렇다 나 어쨌다나. 나는 어지르고 아내는 치우는 종전까지 당연했던 가사분담(?)도 호르몬의 화학반응 탓인지 역할이 바뀌어 가고 있다. 이 번의 이사도 그렇다. 내가 우겨서 샀던 옛집에서 18년 동안 집에 대한 불평을 들어 왔기에, 새집 사는 일은 당신이 알아서 해 하였더니 정말 융자신청서에 싸인 할 때 만 내가 필요했다. 남자가 집 사는 일같이 사소한(?) 것에 일일이 간섭하면 쪼잔 하다고 핀잔 들을 것 같아 중동의 평화 같은 보다 큰 테마에 관심을 쏟고 지냈다. 그렇게 외적으로 스케일 큰 남자도 집에서는 변기 밖으로 오줌 튄다는 아내의 불평 때문에 여자같이 앉아서 일 본다. 한도액 넘게 마구 긁은 혐의로 모든 크레딧카드 몰수라는 무장해제의 수모 때도 말 한마디 못하고 당했다. 내가 그토록 애써 참아서인지 우리 마눌님은 유관순누나 보다도 더 씩씩하고 용감하게 변해 간다.

문 열고 빠끔히 고개 내민 아내가 짐 정리하느라 밥 할 시간 없다고 외식하제서 근처 와플하우스로 갔다. 음식점에서 언제나 그렇듯, 까탈부리며 까다롭게 주문한 아내의 음식엔 빵이 나오지 않았다. 메뉴판 그림을 조목 조목 손가락질하며 주문했던 자기도 민망하였던지 겸연쩍게 접시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웨이츠레스를 부른다. 웨이츠레스는 바빠서 오지 못했다. 빵 없이는 음식에 손도 대지 않겠다는 낌세 여서 내가 먹으려고 딸기잼을 골고루 바르던 빵을 무심코 아내에게 내밀었다.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던 아내의 얼굴에 홍조 띤 미소가 번진다. “오래 살다 보니 별일이네 빵에 잼을 다 발라 주고….” 평생 없던 생경한 봉사에 감동 받았나 보다. 받기만 하고 베푼 적 없는 죄스러움인지 영 어색하고 쑥스러운 시간이었다. 더구나 빵을 우물거리던 아내가 허니를 듬뿍친 와플 찍은 포크를 팔 뻗쳐 내밀며 입을 벌리란다. “이 여자가 지금 에로비디오 찍는 줄 아나..남세스럽게…” 말은 그리 했지만 생급스럽게 목젖이 울컥거렸다.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더니 남들에겐 다 자연스런 행동이 우리에겐 왜 그리 생 되게 어색한지…

자기의 존재에 끊임없이 놀라는 것이 인생이라더니 무심코 한 하찮은 행동이 잔잔한 행복 파장을 일으키는 순간을 경험하며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행복이란 말을 실감한다. 그렇지만 아내를 감동시키는 실수를 자주하면 안 될 것 같은 자성도 든다. 몇 년 전 수제비용 밀가루 반죽을 힘들어 하여 도와줬더니 무척 감격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대가리와 똥을 빼 달라며 한국서 온 멸치자루를 내밀어 황당했던 경험이 있다. 여자는 1인치 주면 1야드를 요구한다던가, 그러나 이 번 이사 때는 오히려 내가 1마일 얻은 셈이다. 생경한 감동에 자분자분하여 진 아내와 언쟁 없이 이사를 해 치웠기 때문이다. 함께 힘든 것 들 때 마다 속절없이 나오는 방귀소리에 낄낄거리며 싸움 한번 없이 이사 끝낸 것이 대견하다. 여자 나이 오십 넘으면 배운 년이나 안 배운 년이나, 예쁜 년이나 미운 년이나 그 년이 그년이라는 아내의 말을 새기며, 새로 액자 만들어 서재에 걸으려던 편액을 도루 말아 캐비닛에 집어 넣었다. 옛 사랑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버전인 현재의 삶에 자족하기로 다짐하면서, 어느 종교단체의 수도원에 있다는 그녀의 근황과 함께 편액을 또다시 묻어 두기로 하였다. 한 여름의 부채바람은 가을이 오면 자연히 없어 지지만 에어컨 바람 앞에서는 한 여름에도 맥 못 추는 게 부채바람이다.

“남편의 사랑이 클수록 아내의 소망은 작아지고, 아내의 사랑이 클수록 남편의 번뇌는 작아진다.” 산악회 웹싸이트에 올라 온 글이다. 사랑에 죽는 여자보다 사랑결핍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여자가 더 많다는 무서운 경구도 있다. 이사 갈 때 떼어 놓고 간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면 아내사랑하기 훈련이 필요한 것 같다. 그래야 언젠가는 딸아이에게 “네 아빠 같은 신랑 골라라”라고 아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애트랜타 앤디: 워메, 꼭 나의 현실을 예전, 현재, 미래를 보는것 같아요. -[07/01-14:28]-


윤문수: 또한번 감동 먹었습니다. 에쿼아돌 원정도 감동을 흠뻑 담아오세요. -[07/02-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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