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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진이의 바람

늘이네
2004.07.16 20:07 1,22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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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마을 '클레멘타인' 혜진이의 '일곱살 인생'


혜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길이 애처롭다. 혜진이는 화상 사고 이후 부분적인 기억상실까지 앓고 있다.


전라남도 해남군 땅끝 마을에 사는 혜진이는 올해 일곱 살이다.



1998년 5월, 어버이날에 태어났다.




그러나 혜진이의 출생과 함께 어머니, 아버지 가슴에는 카네이션 대신 근심 걱정이 자리를 잡았다.




짧기만한 '일곱 살 인생' 혜진이에게 질병과 사고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









입원한 딸아이와 늘어가는 빚더미... 젊은 부부에게 닥친 두 개의 난관은 바로 절망, 또 절망이었다.




땅끝 마을에서 엠뷸런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투병하는 혜진이 가족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가난과 질병, 서로의 꼬리를 물고 굴러가는 악순환 속에서 아직도 힘들게 살아가는 바로 우리 주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태어난 지 보름 만에 “일주일이 고비”▽


언제부턴가 혜진이의 얼굴엔 웃음이 사라졌다.또래 아이들이 노는 걸 그냥 멀찍이 바라볼 뿐이다.


산부인과에서 태어난 혜진이가 소아과에 다시 입원한 건 정확히 보름 만이었다.




분유만 먹이면 토하고 설사를 하던 혜진이의 병명은 '분유 알러지'.




입원할 때 3.3kg이던 몸무게는 보름 만에 1.9kg으로 줄었다. 몸은 꼬챙이처럼 말라갔고 소화기능을 잃은 배만 올챙이처럼 튀어나왔다.




결국 혜진이의 양쪽 어깨엔 어른 손바닥보다 더 긴 주사바늘이 꽂혔다.




영양공급 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야윈 몸 어디에서도 혈관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주사 바늘 때문에 혜진이는 다시 패혈증이라는 합병을 얻었다.




주사 바늘을 통해 세균이 몸속으로 들어와 혈액을 감염시켰다.




의사는 "앞으로 일주일이 생명의 고비"라고 말했다.




어머니 문희정(33)씨는 "아는지 모르는지 잠만 자는 혜진이를 보면서 한없이 우는 일 말고 할 일이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혜진이는 무사히 일주일을 넘겼고 꼬박 100일 만에 병을 떨쳐냈지만, 젊은 부부 앞으로는 700만원의 병원비가 청구됐다. 이들 부부가 처음 ‘빚’이란 걸 지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창고에서 시작한 결혼생활▽


혜진이 어머니 아버지는 열아홉, 스물둘 나이에 만나 5년 연애 끝에 지난 95년 결혼했다.




정확히 말하면, 남편 김성국(36)씨의 형님 댁 열 평짜리 창고를 개조해 그냥 '함께 살기' 시작했다.




문씨는 연애 시절에 대해 물으면 아직도 "그냥 남편이 좋았다"며 말 끝을 얼버무리다 얼굴을 붉힌다.




마을 주민들은 김씨의 새출발을 위해 마을 앞바다에 100m 가량의 김 양식장 ‘1구간’을 무상으로 내주었다.




김씨는 김 양식 일손이 노는 여름에는 바다에 나가 장어를 낚아 팔면서 열심히 살았다. 이듬해에는 큰 딸 진선이도 태어났다.




남편 김씨는 “돈을 모을 수는 없었지만 먹고 사는 데 큰 걱정은 없었던 시절”이라며 “그 때가 정말 좋았다”고 말했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혜진이의 퇴원과 함께 시작된 1천만원의 빚은 넉 달 뒤 5천만원으로 불어났다.




김씨가 “뭔가 해보겠다”며 배를 사고, 김 양식 구간을 늘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듬해인 99년은 해남군 전체의 김 양식장에 태풍이 덮친 해였다.




아내 문씨는 “그 다음해에는 큰 배가 지나가면서 김이 다 쓸려갔고... 아무튼 그 뒤 3년 내내 바다에서 건져낼 게 없었다”고 말했다.




‘건져낼 게 없을수록’ 부부가 바다에 머무는 시간은 점점 늘어갔다.




둘째딸 혜진이가 사고로 다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




혜진이가 네 살이 되던 어느 여름 저녁에는 가슴께에 바다물이 차오를 때까지 혼자 뻘밭에서 놀기도 했다.




어둑한 저녁 바다에 혼자 울고 서있는 혜진이를 옆집 아저씨가 발견하지 못했다면 밀물에 휩쓸려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여섯 살 때는 집에서 혼자 놀다가 큰 가위로 코 밑을 찌르기도 했다.




당시 상황을 얘기하면서 문씨는 혜진이 코 밑의 꿰맨 자국을 손가락으로 자꾸 문질러댔다.




사고가 날 때마다 혜진이는 항상 혼자였고 부모님은 ‘건져낼 것 없는’ 바다에 나가 있었다.




혜진이 몸에 불길이 덮쳤던 지난 2월 25일에도 어머니 아버지는 갓 수확한 미역을 팔기 위해 마을 공판장에 있었다.



▽"혜진이 불났다"▽


3도 화상을 입은 혜진이의 다리

그 날 아침 부모님이 일 나간 사이, 혜진이는 언니 진선이 손을 잡고 학원에 따라갔다. 언니가 수업을 받는 동안 혜진이가 동네 아이들과 함께 있는 곳은 동네 쓰레기 소각장.



그런데, 다 타버린 줄 알았던 쓰레기더미 속의 불씨가 혜진이 왼쪽 바지 끝단에 옮겨 붙었다.




불은 왼쪽 바지를 다 태우고 오른쪽 다리 아랫부분까지 옮겨간 뒤에야 어른들에게 발견됐다.




동네사람들은 ‘혜진이 몸에 불났다!’며 공판장으로 달려왔고 문씨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뒷통수에 날벼락이 내리치는 느낌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부부가 사고 현장으로 달려왔을 때 혜진이는 이미 동네 사람들 손에 의해 해남군 병원을 거쳐 전남대 병원까지 옮겨진 뒤였다.




“이대로 놔두면 아이 죽는다. 빨리 서울로 옮기라”는 의사 말을 듣고 혜진이 가족은 그 날 저녁 앰뷸런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 때까지만 해도 혜진이 다리는 그냥 노랗고 거뭇한 상처 밖에 없었어요. 아이는 더 이상 울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고요. 하지만 겉상처를 제거하고 보니 속은 이미 뼈까지 다 타들어갔더라구요.”




혜진이는 피부 전체가 벗겨지는 하반신 3도 화상의 진단을 받았다.





▽일곱살 인생 혜진이의 투병기▽


그 날부터 혜진이와 어머니의 쓸쓸한 상경 투병이 시작됐다.




혜진이는 매일 소독약 호스로 샤워를 해야 했다. 그 때마다 전신마취를 했고, 전신마취를 할 때마다 문씨는 각서를 썼다.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더라도 병원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혜진이는 낮에 받은 치료의 고통을 밤마다 잠꼬대로 되뇌었다.



“아, 뜨거워.” “나 소독 안 해.” “싫어, 밥 안 먹을래.”


그럴 때면 ‘시끄러워 잠 못 자겠다’는 다른 환자들 불평 때문에 한밤중에 낯선 수술실로 침대를 옮긴 적도 많았다.




덩그러니 넓은 수술실에 혜진이와 단 둘이 지샌 밤을 떠올리면서 문씨는 “너무나... 너무나 서러웠다”고 울먹였다.




병간호를 하면서도 문씨의 마음은 늘 눈물에 젖어 있었다.




혜진이는 대변을 본 뒤에도 “안 쌌다”고 시치미를 떼기가 일쑤.




변을 닦아낼 때 상처부위의 통증이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혜진이를 멀거니 바라볼 수밖에 없다.




“냄새는 나는데...어린 것이 얼마나 아프고 싫었으면 제 옷 속에 그걸 두고도 거짓말을 할까요.”




혜진이가 가장 즐거워하는 때는 휠체어를 타고 병원 근처로 외출할 때.




“한번은 치킨을 사주려고 병원 근처로 나갔어요. 그런데 혜진이가 자꾸 가게 밖을 쳐다 보더라구요. 제가 보니까 혜진이만한 또래 여자 애들이 모여서 놀고 있었어요. 맘이 너무 짠해서 얼른 치킨을 사서 돌아서려는데 혜진이가 제 팔을 잡더라구요. ‘엄마 나 쟤들 노는 것 좀 더 보다 가면 안돼?’”




5개월째 병원 생활을 하고 있는 혜진이는 말수가 부쩍 줄었다.




‘포스트 트라우마틱 스트레스 디스오더’(외상후성 스트레스 장애)라는 정신 질환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이 병은 외부의 강한 충격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보이는 일시적인 기억상실.




의사는 “일단 몸부터 고치고 정신과 치료를 받자”고 말했다.




▽고통과 사랑은 함께 전염되어▽


고통은 혜진이 뿐만이 아니다.




언니 진선(9)이는 병원에 입원한 혜진이를 처음 봤을 때 경기를 일으켰다.




할머니 역시 병실의 혜진이를 처음 보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갔다.




3년 전 중풍으로 누운 친정어머니께는 아직 혜진이의 사고를 알리지도 못했다.




그래도 고마운 건 마을 사람들.




800명 남짓한 해남군 어란리 사람들은 두 차례 일일찻집을 열어 모은 돈 250만원을 혜진이 치료비에 보탰다.




문씨는 “우리 마을 250가구 중 거의 모든 집에서 문병을 다녀갔다”고 말했다.




어란리 이장은 “김씨네는 다섯 형제 모두가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랐는데 모두 성실하고 착한 사람들”이라며 “인근 해수욕장이 문을 열면 마을 사람들이 또 커피를 팔아서 돈을 모으기로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병원비는 턱없이 부족하다.


지금까지 나온 병원비는 2천만원 정도. 형제들과 동네 사람들이 모아 준 돈으로 8백여만원은 냈지만 나머지는 지난 4월 이후 계속 밀려있다.


게다가 피부이식 수술을 계속하려면 앞으로도 매달 5백만원씩의 병원비가 들어야 한다.


농·수협에 낸 빚만도 이미 8500만원 정도. 이미 ‘더 이상 돈을 빌려주기 어렵다’는 통보를 받은 상태다.


▽"바다가 밉기만 하네요."▽

요즘 문씨는 애꿎은 바다를 탓하는 게 버릇이 됐다.


어디 미워할 사람도, 하소연할 곳도 없기 때문이다.


타버린 살갗을 갖고 살아가야 할 혜진이의 고통도 바다 끝처럼 막막해 보인다.


아버지 김씨는 아픈 딸을 서울에 둔 채 오늘도 장어를 잡기 위해 해남 앞바다에 주낙을 드리우고 있다.


김씨는 이 바다에서 다시 희망을 낚을 수 있을까.


“그 날 바다에만 안 나갔어도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텐데... 얼마나 뜨거웠을까요, 우리 혜진이.

저, 그동안 세상에 미워하는 거 없이 살았는데요... 그냥 바다가 밉기만 하네요.”


문씨의 떨리는 목소리가 아프게 와 닿는다.


김현 동아닷컴기자 h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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